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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후 도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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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후 도시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60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6번의 임기를 역임하며 48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문부대신, 내각관방부장관 등을 지냈고, 1989년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어 제76대, 77대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을 방문, 걸프 전쟁 당시 해상자위대 파병,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통해 재일 한국인 지문 날인 폐지를 약속했다. 1994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여 신진당을 창당, 이후 자유당, 보수당을 거쳐 2003년 자민당에 복당했으며, 2009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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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후 도시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 1989년
이름가이후 도시키
로마자 표기Kaifu Toshiki
출생일1931년 1월 2일
출생지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일2022년 1월 9일
사망지일본 도쿄
배우자사치요 야나기하라
자녀2명
서명KaifuT kao.png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1960–1994; 2003–2022)
기타 정당신진당 (1994–1997)
"무소속 의원 모임" (1997–1998)
자유당 (1998–2000)
보수당 (2000–2003)
학력주오 대학 졸업
와세다 대학 졸업
관직
직책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89년 8월 10일 – 1991년 11월 5일
국왕아키히토
이전 총리우노 소스케
다음 총리미야자와 기이치
직책자유민주당 총재
재임 기간1989년 8월 8일 – 1991년 10월 30일
이전 총재우노 소스케
다음 총재미야자와 기이치
직책재무대신
재임 기간1991년 10월 14일 – 1991년 11월 5일
이전 재무대신하시모토 류타로
다음 재무대신하타 쓰토무
직책문부대신
총리나카소네 야스히로
재임 기간1985년 12월 28일 – 1986년 7월 22일
이전 문부대신마쓰나가 히카루
다음 문부대신후지오 마사유키
총리후쿠다 다케오
재임 기간1976년 12월 24일 – 1977년 11월 28일
이전 문부대신나가이 미치오
다음 문부대신스나다 시게타미
이전 문부대신가지야마 세이로쿠
다음 문부대신구지라오카 효스케
직책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1960년 11월 20일
임기 종료2009년 7월 21일
선거구아이치 3구 (1960–1996)
아이치 9구 (1996–2009)
이전 의원다선거구
다음 의원오카모토 미쓰노리
기타 직책
직책신진당 초대 당수
임기 시작1994년 12월 8일
임기 종료1995년 12월 28일
직책자유민주당 제14대 총재
임기 시작1989년 8월 8일
임기 종료1991년 10월 30일
직책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미키 다케오
임기 시작1976년 9월
임기 종료1976년 12월
훈장 및 칭호
칭호정2위
훈장[[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40px]] 대훈위국화장
훈장[[파일:JPN Toka-sho BAR.svg|40px]] 동화대수장
칭호명예 아이치현민장
학위법학사 (와세다 대학 - 1954년)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가이후 도시키 공식 홈페이지

2. 성장 과정 및 교육

아이치현 나고야시 출신이다.[1] 구제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 대학 제2법학부 법학과에 편입하여 공부했다.[2][30] 대학 재학 중에는 주오 대학 사달학회와 와세다 대학 유변회 등 웅변회에서 활동했다.[30] 학생 시절부터 고노 킨쇼 중의원 의원의 비서로 일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 1956년에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중퇴하고 비서직에 전념했다.

2. 1. 유년 시절

1931년 1월 2일,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東区) 나나마가리초(七曲町)(현재 히가시구 히가시자쿠라(東桜) 1정목)에서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가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나카무라 사진관'을 운영했으며, 가게는 나카구(中区) 사카에(栄)의 마쓰자카야 나고야점 북쪽에 위치했다.[1]

1943년 3월, 나고야시립 미나미쿠야 국민학교(현재 나고야시립 사카에 소학교)를 졸업했다. 구제 아이치이치 중학교(현재 아이치현립 아사히가오카 고등학교) 입시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했다. 당시 같은 학교에서 응시한 11명 중 9명이 합격했다. 같은 해 4월, 구제 도카이 중학교(현재 도카이 중학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태평양 전쟁 중 학도 동원으로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공장에서 비행기 엔진 부품 조립에 동원되었다.[1]

1945년, 대일본제국 육군의 소년비행병학교에 합격했지만, 10월로 예정된 입교 전에 전쟁이 끝나 입교하지 못했다.[1] 이후 구제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제2법학부 법학과에 편입했다.[2] 주오 대학 재학 중에는 중앙대학교 사달학회(辞達学会)에,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는 와세다대학교 유변회(雄弁会)에 소속되어 활동했다.[30]

대학생 시절부터 고노 킨쇼(河野金昇)의 비서로 일했으며, 1956년에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중퇴하고 비서직에 전념했다. 1957년 11월 17일, 기후현 미노시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구 기후 제1구의 야나기하라 사부로(柳原三郎) 중의원 의원을 돕던 인물이었다.

1958년 3월 29일, 그가 모시던 고노 킨쇼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가이후도 후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미키 다케오의 결정으로 고노의 부인 고노 타카코(河野孝子)가 지역구를 계승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20일 고노 타카코의 공설 비서가 되었으며, 5월 22일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그녀의 당선을 도왔다.

2. 2. 학창 시절

1931년 1월 2일,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나나마가리초(현재 히가시구 히가시자쿠라 1정목)에서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가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나카무라 사진관'을 운영했으며, 가게는 나카구 사카에의 마쓰자카야 나고야점 북쪽에 위치했다.[1]

1943년 3월, 나고야시립 미나미쿠야 국민학교(현재 나고야시립 사카에 소학교)를 졸업했다. 구제 아이치이치 중학교(현재 아이치현립 아사히가오카 고등학교) 입시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했다.[1] 같은 해 4월, 구제 도카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중 학도 동원으로 나고야시 히가시구 오오사치에 있던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에 배치되어 항공기 엔진 부품 제작에 동원되었다.[1]

1945년, 대일본제국 육군의 소년비행병학교에 합격했지만, 10월 입교 예정일 전에 전쟁이 끝나 입교하지 못했다.[1] 전쟁 후 구제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2] 신제 와세다 대학 제2법학부 법률학과에 편입했다.[2] 주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중앙대학교 사달학회(中央大学辞達学会)에,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와세다대학교 유변회(早稲田大学雄弁会)에 소속되어 활동했다.[30] 1956년에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중퇴했다.

3. 정치 경력

1991년 7월 15일 런던에서 열린 제17차 G7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함께 있는 가이후(왼쪽에서 다섯 번째)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1960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당시 전국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3][32] 이후 16번의 임기를 역임하며 총 48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4]

국회의원 활동 중 문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며,[5]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우노 소스케 총리가 연이어 사임하자, 상대적으로 청렴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야시 요시로이시하라 신타로를 누르고[6]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어 같은 해 8월 제76대 일본 총리에 취임했다.[7][8][9]

총리 재임 중이던 1991년 8월, 톈안먼 사건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던 중국을 서방 선진국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문하여 일본의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경제 지원을 약속했다.[10][11] 또한 1991년 걸프 전쟁이 끝난 후 페르시아만해상자위대 소해 부대를 파견하여 자위대 창설 이후 첫 해외 실전 임무 수행이라는 기록을 남겼다.[12]

그러나 당내 기반이 취약하여 다케시타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주요 정책 결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정치 개혁 추진 과정에서 당내 반발에 부딪혔고, 사가와큐빈 사건의 여파 속에서 결국 1991년 11월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미야자와 기이치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13]

1994년 자민당이 일본사회당과 연립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을 총리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신진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가 되었다.[14][15] 자민당 총재 출신이 탈당하여 다른 당의 당수가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58] 같은 해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총리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국회 표결에서 패배했다.

신진당 해체 후 자유당, 보수당, 보수신당 등을 거쳐 2003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 합병되면서 자민당에 복당했다.[16]

2009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 오카모토 미쓰노리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17] 이 선거는 1955년 이후 지속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18] 가이후는 총리 경험자로서는 1963년 이후 처음으로 낙선하는 기록을 남겼다.[19][61] 낙선과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49년간의 정치 활동을 마감했다.

3. 1. 정치 입문

아이치현 나고야시 출신으로 주오 대학을 졸업한 뒤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편입했다.

고노 이치로 대신 비서로 일하던 중, 1960년 9월 16일 차기 중의원 선거 구 아이치현 제3구 출마를 결정했다.[31]

같은 해 11월 20일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전국 최연소(당시 만 29세)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3][32] 그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이후 16번의 임기를 역임하며 총 48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4]

초선 당시의 가이후(『주간 산케이』1960년 12월 26일호)


당선 직후인 1960년 12월, 자민당 청년국 학생부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에는 청년 해외 협력대 창설 구상을 정리하고 이를 위해 아프리카를 횡단 조사하는 등 단체 설립에 기여했다. 1965년에는 자민당 청년국장이 되었다.

1971년경까지 이치노미야시에서 하숙 생활을 했으며, 이후 같은 시에 자택 겸 사무실을 마련했다.[33]

정치적으로는 미키파에 속했으며, 미키파가 카와모토파로 바뀐 이후에는 1994년 탈당 전까지 사실상 파벌 내 2인자로서 가와모토 토시오를 지지했다. 그러나 자금 지원에는 소극적이어서 "지갑 닫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나미 타카오 등과 함께 차세대 리더를 의미하는 "네오 뉴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와세다 대학 웅변회 선배인 다케시타 노보루와의 친분 때문에 "현 주소는 카와모토파지만, 본적은 다케시타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66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내각)에서 노동정무차관을 시작으로 정부와 당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1972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1973년 자민당 인사국장, 1974년 자민당 부간사장을 역임했다. 1974년 미키 내각에서는 내각관방부장관에 발탁되어 내각관방장관 이데이치 이타로를 대신해 람뷔예 정상회담 관련 실무 조정을 담당했으며, 1975년 파업권 파업 문제 당시 정부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1976년 9월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었다.

첫 번째 문부대신 시절의 가이후(1976년경)


같은 해 12월,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쇼와 시대 출신 첫 각료가 되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다시 문부대신을 맡아 공통 1차 시험 도입 등을 추진했다.[5]

3. 2. 자민당 내 활동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1960년 9월 16일, 차기 중의원 선거 구 아이치현 제3구 출마가 결정되었고[31], 같은 해 11월 20일 총선에서 전국 최연소로 당선되어 국회의원 경력을 시작했다.[3][32] 그는 이후 16번의 임기를 역임하며 총 48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4]

정계 입문 초기인 1960년 12월에는 자민당 청년국 학생부장에 취임했으며, 1964년에는 청년 해외 협력대 창설 구상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를 조사하는 등 단체 창설에 기여했다. 1965년에는 자민당 청년국장이 되었다.

1966년 노동정무차관을 시작으로 1972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31], 1973년 자민당 인사국장, 1974년 자민당 부간사장 등 당내 요직을 거쳤다. 1974년 미키 내각에서는 내각관방부장관에 임명되어 람뷔예 정상회담 조정을 담당하기도 했고, 1975년 파업권 파업 문제 당시 정부 대표로 활동했다. 1976년 9월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으며[31], 같은 해 12월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처음으로 문부대신으로 입각했다.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쇼와 시대 출생자로는 첫 각료였다. 1985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도 다시 문부대신을 맡아 공통 1차 시험 도입 등에 기여했다.

카이후는 미키파(후에 카와모토파로 개칭) 소속이었으며, 1994년 탈당 전까지 파벌 내 2인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자금 기여가 적어 "지갑 닫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나미 타카오 등과 함께 차세대 리더를 의미하는 "네오 뉴 리더"로 불렸으며, 와세다 대학 웅변회 선배인 다케시타 노보루와의 친분 때문에 "현 주소 카와모토파·본적 다케시타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9년 7월 24일, 우노 소스케 수상이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자민당은 새로운 총재를 선출해야 했다. 당시 리쿠르트 사건의 여파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책임을 지고 탈당했고,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 신진 지도자들은 당의 징계 중이었다. 주요 4대 파벌(다케시타파, 아베파, 미야자와파, 구 나카소네파) 모두 후계 총재 후보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노 사임 발표 당일, 오자와 이치로, 카지야마 시즈로쿠, 오쿠다 케이와 등 다케시타파 간부들은 하시모토 류타로 옹립 가능성을 논의했으나[34], 파벌 분열 우려로 인해 가네마루 신 등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한편, 다케시타 노보루는 와세다 대학 동문이자 상대적으로 정치 기반이 약해 통제하기 용이하다고 판단한 카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7월 26일, 다케시타는 카이후를 만나 자파에서 하시모토를 옹립하기 어렵다는 뜻을 전하며 사실상 카이후 지지 의사를 내비쳤다. 카이후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서 죽어야 하므로, 그 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며 7월 29일 경 출마를 결심했다. 7월 31일, 다케시타파는 공식적으로 자파 후보 옹립 포기를 결정했고 하시모토도 불출마를 선언했다.[35] 카와모토파 내에서는 가와모토 토시오 옹립 움직임도 있었으나, 결국 8월 2일 가와모토는 출마를 포기했다.[36] 같은 날 카이후는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37]

1989년 8월 8일 실시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는 카이후 외에 하야시 요시로(니카이도파, 미야자와파 지원)와 이시하라 신타로(아베파)가 출마했다.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카이후는 두 후보를 누르고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6][7][8] 리쿠르트 사건으로 실추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청렴한 이미지를 가진 카이후가 간판으로 내세워진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총리 취임 후에도 카이후의 당내 기반은 여전히 취약했다. 중소 파벌 출신이었기에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 특히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그리고 당시 간사장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제1차 가이후 내각 조각 당시, 카이후는 인선 과정에서 배제된 채 오자와 등 당 간부들이 주도했으며, 총리 관저에서 형식적인 임명 절차만 진행했을 정도였다. 전 내각관방부장관 이시하라 노부오는 "카이후 총리는 중대한 법안 등을 결정할 때 가네마루, 다케시타 두 분의 판단을 구했다"고 회고했으며, 오자와 이치로로부터 "해부는 정말 바보 같다"는 혹평을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41][42] 카이후 자신도 회고록에서 오자와가 자신을 낮게 평가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카이후는 정치 개혁을 주요 과제로 내걸었으나, 소선거구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 4법은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소위 'YKK'를 포함한 당내 반대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폐기되었다. 정치 개혁 실패는 카이후 정권의 종말로 이어졌고, 1991년 11월 총리직과 자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13]

1994년 6월 29일,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당의 정권 복귀를 위해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하여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총리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자, 카이후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는 신생당, 일본신당 등 구 연립여당 세력의 추대를 받아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자민당 내 동조 탈당이 예상보다 적어 결선 투표에서 무라야마에게 패배했다.

탈당 후인 7월 27일, 카이후는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초대 대표로 취임했다.[57] 같은 해 12월 10일에는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신진당을 창당하여 초대 당수에 올랐다.[14][15] 자민당 총재를 지낸 인물이 탈당하여 다른 정당의 당수가 된 것은 일본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58]

신진당 분당 후 1년여 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원내 교섭단체 "무소속의 회)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 자유당이 분열하자 연립 잔류파가 만든 보수당에 합류했고, 이후 당명이 변경된 보수신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2003년 총선 직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 합병되면서 카이후도 9년 만에 자민당에 복당했다.[16] 복당 후에는 옛 소속 파벌(카와모토파의 후신인 다카무라파)로 돌아가지 않고, 니카이 도시히로 등 구 보수신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니카이 그룹을 결성했다.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아베 신조는 카이후의 복당을 "두 손 들고 환영한다"고 말했으며, 탈당 시 철거되었던 당 본부의 카이후 초상화도 다시 걸렸다.

2009년 총선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아이치현 제9구)에서 민주당의 신인 오카모토 미쓰노리에게 8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패배했다.[17] 자민당의 73세 정년 규정으로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도 불가능했기에 그대로 낙선했다. 이 선거는 1955년 이후 지속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린 상징적인 선거이기도 했다.[18] 낙선과 함께 카이후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그는 16선으로 현역 최다선 중의원 의원이었으며[19], 총리 경험자가 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1963년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데쓰 이후 46년 만의 일이었다.[61] 자민당 총재 경험자로서는 이시바시 이후 두 번째 낙선이었다.

3. 3. 총리 취임 및 활동



1990년 7월 7일, 휴스턴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좌)와


1991년 4월 18일, 아카사카 궁전에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좌)와


1990년 베를린 장벽 방문


다케시타 노보루우노 소스케 총리가 연이어 사임한 후, 가이후는 당 대표직에 오르기 전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5] 1989년 7월 24일, 우노 소스케 수상이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표명하면서 후임 총재 선출이 시급해졌다. 당시 자유민주당 내 주요 유력 의원들은 대부분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책임을 지고 탈당했으며,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은 당 규정에 따라 당직 사퇴 징계 중이었다. 이로 인해 4대 파벌(다케시타 파, 아베 파, 미야자와 파, 구 나카소네 파) 모두 후계 총재 후보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케시타 전 총리는 와세다 대학 동문이자 청렴한 이미지를 가진 가이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리쿠르트 사건 이후 깨끗한 이미지가 필요했고, 중소 파벌 출신으로 독자적 기반이 약한 가이후가 통제하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케시타 파 내에서는 하시모토 류타로 옹립 움직임도 있었으나[34], 파벌 분열 우려로 무산되었고[35], 가와모토 파의 수장 가와모토 토시오 역시 출마를 포기했다.[36] 8월 2일, 가이후는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37]

1989년 8월 8일 열린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가이후는 하야시 요시로이시하라 신타로[6] 누르고 총재로 선출되었다.[7][8] 이튿날인 8월 9일, 제76대 일본의 총리로 취임했으며,[9] 1990년 2월 제77대 총리로 재선되었다. 그는 쇼와 시대 출생 최초의 총리였다.

총리 취임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 호황기였으나, 리쿠르트 사건 등으로 정치 불신이 팽배했다. 가이후는 신선한 이미지로 기대를 모았고, 내각 구성 과정에서 리쿠르트 연루 의혹이 적은 인물들을 등용했으나 이는 당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제1차 가이후 내각 출범 직후 내각관방장관 야마시타 노리오의 여성 스캔들이 터지자 즉각 경질하고, 모리야마 마유미 환경청 장관을 임명하여 최초의 여성 관방장관을 탄생시켰다.

참의원 선거 패배로 여소야대 국면인 꼬인 국회 상황에서 총리가 되었으나,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을 이끌었다.[38] 같은 해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1990년 뉴욕 대학교, 1991년 보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39][40]

그러나 당내 기반이 취약했던 가이후는 다케시타 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시하라 노부오 전 관방부장관은 회고록에서 가이후가 중대 사안 결정 시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의 판단을 구했다고 밝혔으며, 당시 자민당 간사장 오자와 이치로는 "가이후는 정말 바보 같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내각 구성 역시 오자와 등 당 간부들이 주도했다는 평가가 있다.

외교적으로는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오자와 이치로 주도로 다국적군에 130억달러를 지원했으나, "돈만 내고 사람은 보내지 않는다"는 비판과 "미국에 끌려다닌다"는 상반된 비판을 받았다. 휴전 후에는 페르시아 만에 해상자위대 소해부대를 파견하여 자위대 창설 이래 첫 해외 실전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12] 1991년 4월에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회담했다.

1991년 8월 10일,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서방 주요국 정상 중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외교적 고립을 깨는 역할을 했다.[10] 이 방문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당내 원로들의 제재 해제 요구[44] 및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와의 조율[46][47][48][52]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본의 대중국 경제 제재를 종식시키고 9.499억달러의 차관과 150만달러의 긴급 원조를 제공했다.[11] 가이후는 방중 시 천안문 광장에 헌화했다고 밝혔다.[45]

또한 1991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방일한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재일 한국·조선인의 지문 날인 제도 폐지를 약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가이후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정치 개혁의 핵심이었던 소선거구제 도입 등에 반대하는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소위 'YKK'를 비롯한 당내 반발과 사가와큐빈 사건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정치 개혁 법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리더십에 타격을 입었고, 1991년 11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13] 후임 총리로는 미야자와 기이치가 취임했다.

3. 4. 탈당과 신당 창당

1991년 11월, 정치개혁 법안 처리에 실패하고 당내 지지를 잃으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3]

1994년 6월 29일, 당시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정권 복귀를 위해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손잡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 후보로 지지하기로 결정하자, 가이후는 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는 신생당, 일본신당 등 구 연립여당 세력의 추대를 받아 총리 후보로 나섰지만, 자민당 내 추가 이탈표가 예상보다 적어 결선 투표에서 무라야마에게 패배했다.

탈당 후 가이후는 독자 세력화에 나섰다. 1994년 7월 아이치현 참의원 재선거에서는 야당 통합 후보였던 쓰즈키 유즈루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으며[57] 자민당과 완전히 결별하는 모습을 보였다.[57] 같은 달 27일에는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가이후는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신진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로 추대되었다.[14][15] 자민당 총재를 지낸 인물이 탈당하여 다른 정당의 대표가 된 것은 일본 정치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58]

그러나 신진당은 내부 갈등 끝에 분열되었고, 가이후는 약 1년간 무소속으로 활동했다(원내 교섭단체 '무소속의회'). 이후 자민당과 연립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오자와 이치로의 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 자유당이 분열될 때는 자민당과의 연립 잔류를 택한 보수당에 합류했고, 이 당은 이후 보수신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3년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보수신당 후보로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된 직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 합병되면서 가이후는 약 9년 만에 자민당으로 복당했다.[16] 복당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아베 신조는 "두 손 들고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탈당으로 철거되었던 가이후의 초상화도 당사에 다시 걸렸다. 복당 후에는 과거 자신의 파벌이 아닌, 니카이 도시히로 등 구 보수신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니카이 그룹을 결성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 돌풍 속에 신인 후보 오카모토 미쓰노리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17] 자민당의 73세 정년 규정으로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도 불가능했기에 그대로 낙선했으며, 같은 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총리 경험자가 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1963년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데쓰 이후 46년 만의 일이었다.[61]

3. 5. 자민당 복당 및 정계 은퇴

신진당 분당 후 1년 1개월간 무소속으로 활동(원내 교섭단체 "무소속의회")을 거쳐,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에 참여한 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 자유당 분열 당시에는 자민당 연립 지속파인 보수당에 소속되었다.

보수신당으로 개편하여 임한 2003년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신인 오카모토 미쓰노리에게 비례대표 부활을 허용했지만, 소선거구에서 승리하여 연속 당선 기록을 늘렸다. 선거 직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 합병되는 형태로 자민당에 복당했다. 복당 후에는 구적이었던 가와모토파의 후계인 다카무라파에는 돌아가지 않고, 니카이 도시히로 등 함께 복당한 구 보수신당 의원들과 니카이 그룹을 결성했다. 자민당 복당 당시 자민당 간사장 아베 신조로부터 복당을 "두 손 들고 환영합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탈당 당시 철거되었던 가이후의 초상화도 다시 걸렸다.

2009년 8월 31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아이치현 제9구에 재출마했지만, 40세 어린 의사 출신 후보 오카모토 미쓰노리(민주당)에게 8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참패했다.[17] 당의 73세 정년 제도 때문에 중복 입후보가 불가능하여 비례대표 부활도 할 수 없어 낙선했다. 같은 날 "성(盛)한 자는 반드시 멸(滅)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번 결과는 내 부덕의 소치"라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가이후는 1960년(당시 29세)에 첫 당선되어 시작한 49년간의 정치생활을 현역 최다인 16선으로 마감하였다. 가이후의 총리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 유권자들이 증가한 것도 낙선의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이 선거 패배는 1955년 이후 거의 중단 없이 이어져 온 자민당의 지배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18] 총리 경험자가 낙선한 것은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테쓰 이후 46년 만[61]이며, 자민당 총재 경험자로서는 이시바시 이후 두 번째이다.[19] 해산 당시 가이후의 연속 당선 횟수는 16회, 재직 기간은 48년 9개월로 중의원 의원으로서는 현직 최고였다.

2022년 1월 9일 새벽 4시 도쿄도 시내 병원에서 폐렴으로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4. 대한 외교

총리 재임 중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법안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가 "모처럼 형성된 한일 간의 우호관계를 심각하게 망쳐버린다"고 만류하자 이를 중단하였다.[86] 이는 당시 한일 관계를 고려한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1991년에는 민주화 이후 최초의 대한민국 대통령인 노태우와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랜 현안이었던 재일 한국인의 지문 날인 폐지를 약속했고, 이는 이후 실제로 이행되어 재일 한국인의 인권 개선에 기여하였다.

5. 사망

가이후는 2022년 1월 9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언론에 1월 14일까지 알려지지 않았다.[21][22][23]

사망 당시 맡고 있던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단체직책
세계연방운동협회회장
일본소프트테니스연맹회장
일본티볼협회회장
다이쇼琴협회이사장
EU·재팬 페스트 일본위원회최고 고문
지구환경행동회의 (GEA)최고 고문
중앙정책연구소최고 고문
교육미술진흥회회장
공익재단법인 중부일본서도회명예회장
도기 추카 싱크탱크고문
공익사단법인 전일본아처리연맹명예회장


6. 역대 선거 결과


7. 수상


  • 페루 태양 훈장 대십자장 (1989년)[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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